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슈페어 (문단 편집) == 건축가로서 == [[파일:external/informationng.com/berlin_olympic_stadium_by_pingallery-d3byp9g.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lympiastadion_-_Marcel_Schoenhardt.jpg]] 현재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베를린 경기장]]은 리모델링만 되어 베를린에 남은 나치 시대 유적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다. [[파일:external/www.nuernberg.de/fittosize_584_0_a2d0ebe4306c419ac63dad76eb04eb8a_zeppelinfeld_nov2009.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ichsparteitagsgelaende_Zeppelinfeld_Tribuene_68.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ichsparteitagsgelaende_Zeppelinfeld_Tribuene_58.jpg]] 또한 체펠린 비행장도 나치 조형들이 파괴된 뒤 일부 부분이 철거된 채 계속 남아 현재 독일 국민들의 휴양처로 이용되고 있다. 군수장관으로서의 슈페어는 (부풀려졌다고 할지라도) 꽤 쓸만한 인물이었지만, 정작 본업인 [[건축가]]로서의 평가는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다. 건축가로서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감각은 있었지만, 구시대적인 [[고전주의]] [[건축]]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그시보못|"시대를 읽지 못한 건축가"]]였으며, 사실 그 점이 히틀러의 취향에 맞았다.[* 다만 브루탈리즘으로 대표되는 콘크리트 정글 형식의 건축물은 나치 패망 이후 70년대까지 유행했고(사실 브루탈리즘은 나치 등장 전에도 유행했다. 뉴욕을 보면 알 수 있다.) [[커튼 월]] 방식에게 밀려나면서 북한 같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사라졌다.] 히틀러는 과거 화가지망생 시절부터 고전주의적 예술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현대주의 미술이 도입되고 있던 미술계에 안착하지 못한 인물이니 히틀러 입장에서는 동병상련에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사실 슈페어의 학생 시절 일화나 설계된 건물들의 세부를 보면 슈페어 역시 현대적인 건축물로의 흐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의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줏대를 권력 때문에 버렸다.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조차 히틀러에게 공사를 받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특히 코르뷔제는 프랑스 비시정부 집권 동안 여러 차례 자신의 설계안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물론 실현된 설계안은 없다.] 슈페어 정도로 자기의 건축 철학을 버리면서까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슈페어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히틀러의 스케치와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을 뿐이다. 또한 슈페어의 건물은 오로지 사람을 압도하는 기능만을 중요시 한 것이 대부분으로,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건물들이 아니었다. 슈페어와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제3제국의 수도 [[게르마니아]]와 그 중심의 거대한 돔 "국민 대회의장"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무리한 것이었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기획이 그 당시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했다고 주장했지만...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noaura.com/germania.jpg|width=100%]]}}}|| || 국민 대회의장(Volkshalle, 폴크스할레), 오른쪽의 작은 건물은 "독일의 개선문"인 [[브란덴부르크]]문으로 보이는데 크기 비교를 위해 놓은 것. || 건물은 크게 15만 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290m짜리 [[돔]] 구조물 '국민 대회의장'과 120m의 [[개선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선문은 평양 개선문(60m, 세계 최대의 개선문)의 2배이며, [[판테온]]을 모델로 한 국민 회관의 돔은 2013년까지만 해도 세계 최대의 돔이었던 [[AT&T 스타디움]](275m)보다도 더 크고 [* 2021년 현재 세계 최대의 [[돔경기장]]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싱가포르 국립 경기장]](310m)에 비하면 조금 작은 규모이기는 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보다 17배나 큰 규모였으며 돔 상부에 있는 채광탑의 지름(46m)은 석재 돔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름보다 약간 더 컸다.[* 히틀러가 승리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 걸작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이 건물에 18만 명이 꽉 차면 [[오타쿠 구름|사람들의 입김이 돔 지붕 밑에서 구름으로 응결]]되어 비를 내릴 정도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나치가 승리한 대체역사에서 그 특유의 쓸데없는 웅장함과 거대함 때문에 꼭 등장한다.] 건축공학 전문가들은 수도의 예정지와 거대한 돔 밑의 지반이 너무 약해서[* 베를린은 '''원래 늪지대를 메우고 건설한 도시'''로 지반이 아주 취약하다. 당장 저 베를린이라는 이름조차 '물기가 많은 땅'을 의미하는 슬라브 계열 단어 'Birlin/Berlin'에서 온 말이다. 이런 곳에 저런 엄청난 크기의 건물을 짓는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 엄청난 기초공사가 필요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설사 돔이 건축된다고 하더라도 기울어지거나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위와 같이 거대한 돔이 성공적으로 건축되었다 한들, 계획상으로 그 거리에는 거의 관공서만 배치되어 길게 늘어져 있는 등 물리적인 문제 이외에도 수도 계획 자체에 한참 문제가 많았다. 이렇게 되면 이 요란한 건축물을 [[괴벨스]] 전용 프로파간다 극장 이외엔 민간 행사나 상업용으로는 사용하기 대단히 힘들어지게 된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실용성보다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시키는 기능"을 중요시했던 히틀러의 구시대적 취향을 설명해놓았다.[* 히틀러가 기교를 별로 부리지 않는 고전적인 순수함을 추구했고 찬탄해 마지않던 건은 고대 [[그리스]]의 [[도리아]] 양식이었다. 그는 그리스 식민지 출신이 본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오니아 양식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나치 패망 이후 건물 크기나 높이가 건물의 가치나 사람에 끼치는 위엄에 대해선 별 상관이 없었는데 뒤늦게 깨달았다며, 특히 국민회관의 경우 "다시 보아도 전혀 정상적인 계획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며 "자신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자책했다.[* 같은 건축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슈페어를 보고 '''"네가 미친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 자책도 어느 정도는 정치적인 것이, 나치의 건축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만나는 자리마다 신나게 자신의 건축물을 설명했다고. 히틀러와 슈페어는 건물을 최대한 웅장하게 보이게 원했으며, 수천년이 지나 건물이 파괴되더라도 웅장한 흔적이 남을 것을 신경썼다.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와 같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폐허 가치 이론'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 시대의 사람들이 역사에서 퇴장한 후에도 당시 시대에 남은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존재'를 알려야 된다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과 [[고대 로마]] 시대의 [[콜로세움]]처럼. 웃긴 것은 당시 나치당 간부들이 이것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위대한 독일 제국이 폐허가 되어 갈 때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였다고. ~~물론 제3제국은 역사상 가장 단명한 제국으로, 15년도 못 갔다.~~ 결국 이런 을씨년스러운 건축관은 쓸데없이 넓은 중앙대로 등으로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편 같은 시대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건축가들은 스탈린의 건축물이 천년만년 새 것 같은 건축물이 될 것이라고 아첨을 떨었다.[* 한편 이 동네에서도 [[소비에트 궁전]](Soviet Palace)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건물을 구상하고는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흐지부지 되었다.][* 사실 전쟁으로 인해 흐지부지 된 것도 있지만 소비에트 궁전의 부지도 늪지였다. 정확히는 늪지에 지반공사를 해서 지어놓은 성당을 철거하고 거기에 지으려고 했다.] [[파일:external/books.chosun.com/200408270320_02.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리(프랑스)|파리]]에 온 [[히틀러]]는 이 앞에서 슈페어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히틀러는 소싯적에 파리에서 좀 있어서 파리를 돌아다니며 측근들에게 파리 여기저기를 설명해주기 좋아했다고 한다. ~~[[땅밟기]] [[보불전쟁]] 때부터 이어온 유구한 전통이다~~ 하지만 히틀러가 오기 전에 레지스탕스들이 엘리베이터의 전력을 끊어놔서 [[에펠탑]]에 올라가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